전시 EXHIBITION

《HYPER IMPRESSIONISM》: 인상주의에서 동시대라는 극(極)에 이르기까지

이용학 (큐레이터, 예술기획) 

인간의 정신에 거대한 진리가 흐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 흐름은 때로 종교의 모습으로, 도덕적 규율로, 사회체제의 형태로 시시각각 변화하며 인간의 삶을 휘감았다. 부유하는 낱낱의 생각은 이상(理想)의 이름 아래 하나로 엮여 보편화된 가치를 지향했다. 그러나 문명이 진보를 이루어 내길 끝없이 강구하면서, 기술의 발달과 함께 인간의 의식은 점차 그 커다란 소용돌이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현대인의 일상에서 그리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작은 예로,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개인의 대다수는 TV 등의 대중매체를 통해 가공되고 통제된 정보를 공급받고 수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등장, 군소 매체와 SNS의 발달은 정보의 제공처를 집단에서 개인으로 전이시켰고, 수용자 또한 각자의 기호에 맞춰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모습이 이제는 훨씬 익숙하다. 더는 대다수가 예전처럼 하나의 지점만을 응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다원화된 시대는 다양성의 활성화와 개성에 대한 존중 등 긍정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고립과 단절, 소외의 정서가 만연하다는 상반된 평가 역시 받는다. 혹자는 부정적 면모에 대해 그것이 ‘코로나 사태’와 같은 전 지구적 불행을 겪고 난 이후 더욱 심화됐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필요성의 유무를 떠나, 더는 옛 시절처럼 많은 것을 아우르는 하나의 구심점이 등장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아 보인다. 발터 벤야민이 지적했던 ‘아우라(Aura)의 몰락’이 우리 대에 본격적으로 도래했음이다.

《HYPER IMPRESSIONISM》전은 이렇게 분열을 거듭하는 상황 속에서 파편화된 예술의 간극을 이으려는 의도를 품고 기획되었다. 현대의 미술은 소위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양식이나 개념적 특성보다 단순히 시기에 중점을 둔 특색 없는 칭호다. 이는 너무도 동시다발적으로 산출되고 미시화(微視化)된 작금의 미술 흐름을 어떠한 거대 담론으로 포착하기 힘들다는 점에 기인한다. 본 프로젝트가 인상주의(Impressionism)의 명칭을 표방한 것은 현대미술의 출발점이라 평가받는 인상주의와 그것이 내포했던 의미에 관심을 기울여, 이 혼란한 시대에 다시금 뿌리를 되짚기 위함이다. 이것은 다양성과 포스트모더니티(post-Modernity)에 대한 맹목적인 부정이 아니다. 그보다 멈출 줄 모르는 분화로부터 특정 지점 설정하고 이를 ‘함께’ 응시함으로써 혼돈을 이해하며, 크고 작은 저마다의 가치를 병치하려는 노력이다. 

본 프로젝트에 참여한 예술가들과 기획자들은 과거 인상주의자들이 그러했듯, 개인적이고 고립된 공간인 작업실(Atelier)에서 벗어나 자연의 품으로 향하여 사생과 사색을 행했다. 활동이 이뤄질 만한 장소에 있어 그들이 주목한 곳은 ‘산’이었다. 이는 전시를 주최하는 대구광역시의 지리적 특성에 기인한 것으로 예술가 및 기획자 무리는 비슬산, 앞산, 팔공산 등 대구의 대표적인 세 명산을 오르내리며 개개인의 행위와 생각을 공유하였다. 관객들은 이번 전시를 통하여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13명의 예술가가 공통의 시작점으로부터 어떤 관점을 취하고 교류하며 서로 관계를 맺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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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담아내다

심효선 작가가 그려낸 풍경은 각각 안지랑골과 대원골의 모습이다. 두 곳은 모두 한국전쟁 당시 죄 없는 이들을 향한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슬픈 과거를 지니고 있다. 특히 작가는 공간이 품고 있는 나무와 이끼, 바위, 곰팡이 등의 구성체를 바라보며 그들에게 지난날이 녹아 있음을 느낀다고 언급한다. 화면에 묘사된 골짜기 사이로 서늘하고 아련한 바람이 부는 듯하다. 먼발치의 오랜 구슬픔을 지금 이곳으로 길어오는 심효선의 작업은 시공을 초월하여 장소에 영원한 생명성을 부여한다.

이재호 작가는 산행에서 따온 이미지를 재배치하여 작가 고유의 캐릭터가 살아 숨 쉴 수 있는 가상의 세계를 창조해 낸다. 이처럼 상상력에 의해 재구축된 현실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대상들에 독특한 서사와 심미성을 부여한다. 작가의 세계관은 그 자체로 시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현실과 상상·균형과 불균형·아름다움과 기이함의 대립적 구도 사이에서 미묘한 조화를 탐구하려는 의도를 담아 그 매력을 배가시킨다.

해외에서 이방인의 삶을 살아가며 외로움을 마주해야만 했던 최수영 작가는 자연 속을 거닐며 위로를 받아왔다고 말한다. 그가 경험한 자연은 캔버스로 옮겨지면서부터 단순한 모방의 대상에 머물기를 거부한다. 기억과 상상의 색을 입고 탈바꿈한 풍경은 요동치고 불안정하면서도 포근하고 서정적이다. 작품에는 종종 작가의 자의식이 작은 배의 형상으로 부유하기도 하는데, 이런 광경은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인 이 시대의 모든 자아에 미묘(美妙)한 공감과 위안을 건넨다.

채온 작가가 캔버스에 담아낸 장면들은 얼핏 무엇을 지시하는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삶 속에서 느끼는 찰나의 감정과 감각이 본디 추상적인 것임을 생각한다면, 언어와 이미지 같은 틀조차도 우리의 심상을 완벽히 묘사하진 못함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은 솔직하다. 그것을 체계와 논리 따위로 치장하길 거부하고 오히려 즉자적으로 표현하려 시도하기 때문이다. 이 모호하고도 솔직한 인상에서 확실히 포착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서 분출되기를 갈망하는 자연스럽고도 강렬한 에너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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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으로부터 배우다

‘팔공(八公)’이라는 명칭에는 여러 어원이 전해진다. 그중 유력한 것은 고려의 태조 왕건이 공산전투에서 패배할 당시, 그를 보필하며 희생한 여덟 장군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는 설이다. 김승현 작가는 이 지명의 유래에 영감을 얻어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존립하게 만든 여덟 명의 인물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상은 그가 산행 중 촬영한 자연의 모습을 비추며 해외 현대 미술가를 소개한다. 기록물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담담한 전개에 대해 작가는 풍경과 자막의 내용이 어우러지며 일어날 모종의 작용을 기대한다고 말한다. 역사성을 지닌 과거에 자신을 대입하고 반추하는 행위는 인간이 세상을 슬기롭게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우수 작가는 인간과 자연을 격리하는 자연보호구역의 구조물과 가이드라인을 보며 그 관계성에 대해 고찰하였다고 말한다. 유형의 백색과 무형의 흑색이 자아내는 완연한 대조는 점차 희미하게 변해간다. 이들은 곧 암전되며 하나가 되었다가 다시 분리하기를 반복한다. 은유는 뚜렷해 보이기도 하나 주체와 객체를 둘 중 어디에 대입하는가에 따라 다른 해석을 가능케 한다. 이항대립의 관계와 융화 그리고 순환이라는 구성은, 우리에게 그것을 다각도에서 바라볼 여지를 남기며 작가의 고심에 동참하도록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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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되돌아보다

우리가 몸담은 물리적 공간은 배태열 작가의 손에서 축소된다. 그는 자그마한 큐브(cube)를 최소단위로 설정하고 이를 쌓아 올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 곧 대구광역시라는 장소를 재현해냈다. 집체의 근원에 대해 되짚어 보고자 하는 환원적 관점은 세상을 구성하는 작은 지점과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조망하려는 작가의 의중을 내비친다. 아울러 작가가 제작한 큐브 조각들은 전시장 곳곳에 확대되어 배치돼 작은 휴식의 장소로 기능하고 있다. 이는 관객의 접근을 불허하는 미술품의 권위를 탈피하고 먼저 그에 다가감으로써, 분열된 예술과 개인이 저마다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데 지녀야 할 어떤 태도를 시사한다. 

석정민 작가에게 빛은 가공물로 익숙하다. 현대인이라면 으레 그렇듯, 그의 삶이 자연의 광채보다 전자기기의 화면에서 내뿜어져 나오는 파장에 더욱 많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에 입각해 작가는 일상 곳곳에서 발견된 인공적인 빛의 편린, 특히 파손된 디지털 매체의 그것을 수집하여 작품으로 승화한다. 한때 인간의 생활양식이 태양과 같은 하나의 초월적 기준 아래 정립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본다면, 석정민의 작품은 동시대의 특성을 상징하는 직설적인 메타포로 더욱 크게 작용한다.  

신준민 작가가 산을 오르내리며 보았던 불빛은 산 위의 전망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조명과 운동장의 스포트라이트로 전시장에 자리매김한다. 하나는 발걸음이 닿기 힘든 위치에 자리 잡아 먼발치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외로운 빛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활동이 활발히 일어나는 도심 속의 밀집된 광원을 근경에서 포착한 모습이다. 대조되는 두 불빛에 담긴 은유를 추적하는 일은 흥미롭다. 그러나 그 차이에 집중하기 앞서 둘은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세상을 밝히고 있다. 어쩌면 신준민이 켠 불빛은 ‘다름’을 부정으로 간주하는 우리의 어둑한 시야에, 그 너머를 보도록 길을 비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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뻗어 나가는 생각

홍지혜 작가는 인간의 인식이 쉽사리 미치지 못하는 추상적 지점을 지적한다. 때로 어떠한 생각들은 신체적 편의, 지켜야 할 규범 등 자율과 타율에 의해 구체화되지 못하고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다. 이렇게 삶의 과정 속에서 선택 혹은 완성되지 못하고 탈락해버린 관념(idea)에 대해 작가는 인식과 재인식을 거듭하며 그것을 똑바로 마주하길 서슴지 않는다. 그가 선사하는 검정(black)의 공간은 미완의 개념이 사장된 사각지대인 동시에, 이를 맞대하는 검정(檢定)의 장소로서 작가가 관객에게 제시하는 물음표이다.

‘기억’은 시간의 흐름 속에 점차 떠내려가는 대상이다. 안성환 작가는 이렇듯 잊혀가는 기억 그 자체를 가시화하고 현화(現化)한다. 그렇기에 작가는 그것을 표현하는 데 있어 자신이 겪은 과거의 특정 장면이나 이미지를 재현하지 않는다. 작품에서 기억은 개인의 주관성이 배제된 채 잊힌다는 속성과 흐릿함에 의거하여 그저 하얗게 포개어질 뿐이다. 이 객관성은 때로 무색건조함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그럼으로써 이를 받아들이고 체화할 권리를 오롯이 보는 이에게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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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이세준 작가는 이 세상을 알고자 하는 지적 욕구를 캔버스에 온전히 투사한다. 특히 그는 삼라만상의 특정한 단편에 치중하기보다 전체를 관망하고 이를 왜곡 없이 표현하기를 희망한다. 이러한 의도는 점과 선과 면, 색과 명암, 평면과 입체 등 미술을 구성하는 모든 조형 요소가 혼재된 화면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때로는 그 방식이 축소된 세계를 담고 있는 틀을 변형하기에 이르기도, 추상과 구상의 보편적 구분을 이리저리 횡단하기도 한다. 이토록 와류(渦流) 하는 풍경으로부터 작가가 내던진 제언은 끊임없이 진동하며 관객에게 새로운 시야를 선사한다.

백지훈 작가는 ‘그린다’는 행위를 통하여 세상의 일부 혹은 그 파편을 수집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대지와 물, 돌과 나무 같은 실재적 대상에서부터 추함과 아름다움, 질서와 규범 등의 추상적 관념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경계와 구분은 그림으로써 융해되었다가 이윽고 하나의 덩어리로 탈바꿈한다. 이제 그것은 예리한 파편이기보다 생명을 닮은 것처럼 꿈틀거리면서 무작위적이다. 우리가 현존하는 세계는 이렇게 백지훈의 손 끝에서 하나의 정수로 환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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