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PROJECT

따로 또 같이  Separately, but together

정연진 (전시 기획, 예술학)

예술가들은 보통 협업을 통해 보다 풍부하고 완성도 있는 예술을 선보인다. 음악가들은 홀로 연주를 하기도 하지만 보다 다채로운 음악을 위해 합주를 하여 듣는 이들의 음악적 감성 풍부하게 만든다. 공연 예술가들은 ‘함께’가 익숙하다. 홀로 해야만 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완성된 결과물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수가 고민하고, 수정하고, 연습하고, 평가하고, 격려하며 최고의 공연을 위해 계획된 대로 그리고 연습한 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작가, 문학과 시각예술을 행하는 이들은 유독 외롭다. 물론 다른 작가와 협업을 하거나, 팀을 구성하여 시너지 효과를 내기도 하지만, 이는 일종의 이벤트처럼 일시적인 프로젝트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많은 예술가 중에 미술가는 유독 외롭다. 그리고 이것이 미술 작가의 숙명이라고 하기도 한다.

미술 작업의 특성 상 혼자서 충분히 구상부터 완성까지 해낼 수 있어서인지, 과거에 기술로 여겨졌던 특성 때문인지, 아니면 미술사에서 ‘최초’가 최고가 되는 경우가 다반사 이어서인지, 혹은 개념미술이 대두되면서 결과물인 작품의 완성도보다 작가의 아이디어가 중요하게 되면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지키기 위해서였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미술가들은 ‘혼자’ 작업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작업은 홀로 할 지라도, 유명한 미술가들에게는 그들의 생각을 나누고 영감을 주고받을 친구, 뮤즈 심지어 라이벌도 있었다.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의 그림을 계속 응원했던 이는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문학가 에밀 졸라(Emile Zola, 1840-1902)였고,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는 연인이 바뀔 때마다 작품 스타일도 변화했으며,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m 1869-1954)와 파블로 피카소는 서로를 작업실에 초대하는 것을 꺼리고, 걸핏하면 서로의 작업에 딴죽 걸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견제가 두 작가가 거장이 되는 데 있어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미술가들이 ‘함께’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발달시킨 미술 중 가장 대표적인 미술사조는 아마 ‘인상주의(Impressionism)’일 것이다. 이는 르네상스 이후 최초로 총체적인 미술의 혁신을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상주의는 1860년 초 프랑스에서 발생한 1886년을 기점으로 순수한 의미의 인상주의는 끝이 나지만, 이후 모든 미술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 중요한 미술사조이다. 인상주의 르네상스 시대에 정립되고 쌓아 온 원근법, 균형 잡힌 구도, 이상화된 인물, 명암 대조법 등을 거부하면서 미술의 전통에 변화 혹은 혁신을 가져왔다.

인상주의 미술가들은 세상을 자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고자 했다. 이전까지의 미술에는 정해진 규칙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이전까지 하늘은 무조건 맑은 하늘, 즉 푸른 빛으로만 표현해야 잘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면, 인상주의 미술가들은 저녁 하늘은 검푸른 빛으로, 해가 뜨거나 질 때의 하늘은 붉은 빛이 섞이게, 흐린 날의 하늘은 회색을 좀 더 섞는 등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형태의 재현보다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표면의 색채에 대한 ‘인상’을 그리고자 했다. 현재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그들의 그림이지만, 처음 이들이 작품을 세상에 선보였을 때 세상 사람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작품은 구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파란색이여야 할 하늘이 붉은 색이 되기도 하고 노란색이 되기도 한 것은 엉망진창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인상주의 미술가들의 작품은 너무나 충격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신문의 만화 사설에서는 에서는 임신부는 이러한 추잡한 그림을 보고 충격 받을 수 있으니 그들의 전시를 관람하지 말라고 풍자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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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작품 - 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1872년, 캔버스에 유채, 48x63cm,마르모탕 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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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에 대한 비난을 담은 신문 만화
이전의 미술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의 평가와 평론가들의 독설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꿋꿋이 자신들만의 예술세계를 펼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새로운 미술을 혼자가 아닌 ‘함께’ 만들어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네를 중심으로 한 인상주의 미술가들은 파리의 바티뇰가(현재의 쿠리시가 9번지)에 있던 카페 게르부아(Le café Guerbois) 에 종종 모였다. 1864년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가 카페 근처인 바티뇰 34번지 아파트로 이사오면서 더 가까워진 그들은 밤에 술을 마시기보다는 낮에 미술이나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동안은 아예 매주 금요일마다 모임을 하기도 했고, 카페 주인이 그들의 자리를 맡아주기 했다고 한다. 당시 참석했던 작가로는 판탱-라루트, 르누아르, 드가, 모네, 유럽에서 활동한 미국화가 휘슬러, 바지유, 세잔 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그 이름 하나하나가 미술사에서 너무나 유명한 작가들이지만, 그 당시에는 아직까지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한 진보적인 청년 작가와 다를 바 없었다. 여기에는 미술가뿐만 아니라, 세잔의 고향친구 에밀 졸라, 작가이자 평론가인 이폴리트 바부, 루이 에드몽 뒤랑티, 필립 뷔르티 등과 같은 이들도 있었다.

카페 게르부아에 모이던 예술가들은 프랑스 화가들의 등용문인 살롱전(일종의 국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경향의 미술을 추구하는 방법에 관해 치열한 논의를 했다. 그리고 살롱전에 대응해 지속적으로 인상주의 전시를 개최하며 자신들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 누가 뭐라고 하여도, 어려움이 있어도 그들은 ‘함께’ 이 문제를 헤쳐 나갔다. 이렇게 인상주의는 카페 게르부아에서 탄생하여, 성장했으며, 예술가들의 안식처이자 영감의 장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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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café Guerbo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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Édouard Manet, Au café, 1869, lithographie, 26.3x33.4 cm,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représentant le café Guerbois
한국 근대 미술에도 예술가들의 모임이 있었다. 6·25전쟁 이후 한국은 1960년대부터 급진적인 근대화 산업사회를 겪으며 급속한 사회 변동을 겪었다. 이 당시 국제사회는 6.8혁명, 반전 평화운동, 페미니즘, 제3 세계 문제 등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국가적, 사회적 이슈에 반응하여 당시 청년 작가이던 김구림, 성능경, 이강소, 이건용, 이승택 등은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ST(Space&Time)', '제4집단' 등을 만들고 '청년작가연립전', ‘대구현대미술제’ 등에서 ‘실험 미술’을 선보였다.

그들은 주류를 비판하기도 하고, 일상의 삶 속에서 예술의 의미를 찾았으며, 새로운 매체들을 거침없이 사용하기도 하였다. 당시 한국 미술은 앵포르멜(비정형 미술) 회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에 무동인', '신전동인' 같은 신진 작가 그룹은 1967년 '한국청년작가연립전'을 열어 이에 반발한 반(反)예술을 주장했다. 그들은 앵포르멜의 '뜨거운 추상'에 대항해 '차가운 추상', 즉 기하학적 추상을 선보였다. 연통, 고무장갑, 성냥 등 산업화로 일상화된 물질들을 사용한 '생활 속의 예술'도 등장했다. 한국 미술사 최초의 해프닝 중 하나로 기록된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1967)을 시작으로, 최초의 페미니즘적인 해프닝 '투명풍선과 누드',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의 제2한강교 아래서 화형식 형태로 기성세대를 비판한 '한강변의 타살' 등 여러 해프닝도 1970년대 초까지 계속됐다. 당시 이들의 미술은 '이게 예술이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김구림은 1969년 경복궁 국립현대미술관을 염하듯이 흰 광목천으로 감싸는 '현상에서 흔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주최측은 초상집 같다는 이유로 천을 26시간 만에 철거했다.

이러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실험정신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들은 해외 비엔날레에 도 참여하며 1960-70년대 공존했던 미술 운동과의 영향 관계를 국제적인 위치에서 확인하고, 글로벌 미술계로의 확장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신정권이 불온한 ‘퇴폐 미술’로 지목하여 이들을 경찰에 연행하고, 심판하고, 심문함에 따라 시대적인 불안성과 함께 해체되고 탄압받았다. 그리고 결국 1980년 이후에는 단색화와 민중미술에 밀려 ‘비주류’ 미술로 여겨졌다.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이상하게’ 여겨졌던 실험미술 작가들의 해외진출로 인해 이에 자극받은 추상화가들이 모노크롬 형식과 한국적 전통을 접목한 한국미술의 대표적인 단색화를 발전시켰다고 보기도 한다. 국가적 억압이 없었더라면 좀 더 한국미술이 빠르고 넓게 퍼져 나갔을 수 있다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당시에는 비정상적으로 보였을 수 있으나, 한국 미술에 있어 이들의 미술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러한 미술사적 중요성은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 > 전시가 2023년부터 2024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시작으로 뉴욕의 구겐하임미술관, LA 해머미술관까지 개최되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비주류’로 여겼던 미술이 한국의 대표적인 미술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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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site of Solomon R. Guggenheim Museum,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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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한국실험미술 1960-70년대 전시 포스터
이번 전시는 앞선 미술의 선구자들을 따라 동시대의 다양하지만 무분별한 예술 속 또 다른 새로운 예술에 도전해보고자 하였다. 총 26명의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시간을 할애하여 함께 고난(이라고 쓰지만 등산)을 겪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 경험들을 자신의 작품 속에 녹여냈다. 시시콜콜한 일상의 이야기, 등산에 대한 이야기, 지역에 대한 이야기, 예술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까지 작은 조각조각들이 모여 그들에게 신선한 영감이 되어주었다. 인상주의 작가들이 밖에 나가 순간을 포착하는 것을 넘어서 실제로 자신이 겪은 인상에 타인과 함께 얻는 경험까지 반영하여 우리 나름의 하이퍼 임프레셔니즘(Hyper Impressionism)을 구축했다.

인상주의자들이 보고 느낀 인상만을 표현했다면, 하이퍼 임프레셔니즘의 예술가들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실험미술가들의 면모 또한 가지고 있다. 이들은 개인적인 시각과 인상을 넘어 함께 경험하고 공유한 감정들을 선보인다. 같은 것을 경험하고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 개개인이 주목한 부분은 다르다는 점도 흥미롭다. 일시적인 융합이 아닌, 지속적인 융합을 추구한다. 융합프로젝트라는 명목 하에 서로의 예술에 또는 작업에 대한 이해도 없이 일시적으로 붙었다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라는 담론 하에서 충분한 시간과 관계 형성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개별성을 인정하며 의견을 나눈다. 어떤 이는 인상주의 작가들에게 악평을 했고, 한국 근대 미술가들이 미친 짓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처럼 누군가는 우리에게 식상하다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막연히 아이디어만 있었던 것을 우리는 함께 행동에 옮겼다.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고 해도 실행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이번 프로젝트는 시작하였고 그 결과물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지금 약 26명의 작은 발자국이 미래의 커다란 족적을 남길 수도 있다는 1%로의 가능성도 없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적어도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예술가들에게는 추후 영감의 자양분이자 새로운 네트워크 형성의 계기가 되었고, 관람객들에게도 다시한번 예술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여전히 작업은 개별적이고 독립적이지만 함께 생각을 나누고 의지할 수 있는 예술 동료들이 있고 이들의 예술을 지속적으로 지켜보고 피드백하는 여러분이 있기에 따로 또 같이 예술은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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